세레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딱딱한 나무지만 실컷 걷다가 앉으니 좀 살 거 같았다. 세레나는 등받이에 기대 몸을 늘어뜨린 채 대답했다. "미안할 거까지야. 내가 말을 안 했는데 네가 어떻게 알아?" "그런가." "그런 거야." 늘어진 기분으로 눈을 감자 아까 클레어한테 물어보려고 한 게 생각났다. 뭐 물어본다고 했더라. 세레나는 감은 눈꺼풀 밑으로 눈동...
정확하게 18kg짜리 가방을 짊어진 세레나 로젠펠드는 가방 같은 건 안 메고 훨훨 잘도 떠다니는 노란 형광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주인의 한숨 소리에 맞춰 살랑살랑 흔들린 빛덩어리 몇 개가 바짝 마른 황무지 위를 둥실둥실 떠다녔다. 풀도 안 보이는 황무지에 머문 지 한 달이 조금 넘었다. 누리끼리한 황무지는 그동안 내내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만난 지 한...
* * * 소년은 그 후로도 황금색 누나를 계속 쫓아다녔다. 몇 주가 지나자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 은회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젊은 남자가 무거운 가방이 흔들리는 대로 휘청거리면서 움직였다. 이번에도 형이었다. 희끄무레한 머리카락에 너저분한 옷을 입은 형이었다. 몇 걸음 옮긴 형이 들판 위에 쓰러졌다. 어디선가 비가 후두두 떨어졌다. 땅바닥의 색이 달라졌...
* * * 클레어는 침낭 속에서 눈을 감고 쌕쌕 숨을 쉬는 세레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말 조용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가느다란 숨소리 외엔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조용했나. 지난 3주 동안 들어보지 못한 침묵이 계속 들렸다. 북부를 헤매고 다닐 때도 이런 침묵은 들어보지 못했다. 칼바람이 땅 위를 썰며 불고 바람에 시달리는 사람들...
세레나는 통조림 캔에 묻은 먼지를 모조리 털어냈다. 깨끗해진 캔을 줄줄이 늘어놓은 세레나는 꽁치 통조림에 그려진 배 그림을 손톱으로 살짝 긁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지. 근데 알았어도 만났을까 싶어. 얼굴을 보면 내가 그대로 무너질까 봐. 그동안 잘 버텼다는 믿음이 깨지면 그때 난 어떻게 하지? 언젠가는 보란 듯이 잘 먹고 잘살 거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
* * * 기사님이랑 너는 강에 손 넣어도 멀쩡하잖아, 그런데 난 왜 그러는 거야? 소년이 묻자 그 애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중요한 건 아니었다. 기사님과 그 애는 종종 맑은 물을 서로에게 뿌리는 장난을 치면서 시간을 보냈다. 소년도 끼어들고는 싶었는데 소년이 물을 만지면 얼마 못 가 썩어버려서 금방 재미없어졌다. 뒤로 튕겨 나간 소년은 기사님과 그 애가...
* * * 너무 피곤할 때는 꿈도 제대로 못 꾼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머리가 조금 맑아지고 대신 시간이 지나간다. 가끔 무섭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었는지 가늠해보기 두렵다. 잠에서 끌려 나오면 바람이 분다. 분명 태양이 뜬 낮인데도 불어오는 바람이 눈보라로 변해 빛을 가린다. 빛을 베어낸다. 빛이 잘려나간다. 말린 풀 쪼가리처럼 떨어지는 빛이 비실거리다...
어쨌든 지금은 황무지라는 이야기였다. 못 쓰는 땅. 그래서 항구가 있는 서부에 사람이 더 미어터졌다. 미어터지는 사람들도 북부엔 잘 안 오려고 했지만. 솔직히 이딴 걸 테마파크라고 만들어놓다니 그 작자들은 돈은 많은데 할 일이 너무 없어서 돌아버린 게 분명했다. 바다 위에서 번쩍거리는 형광섬에는 산꼭대기서부터 발원된 강 두 개가 만나 이루는 거대한 호수가 ...
소년이 처음으로 연노란색 여자를 발견한 건 한 달 전이었다. 여자니 누나였다. 황무지에 들어온 누나. 얼마 안 가 죽을 게 분명한 불쌍한 누나. 소년은 늘 황무지에서 살았다. 정확하게는 황무지 색으로 칠해진 섬 안에서 살았다. 황무지를 흐르는 강 한가운데에 삐죽 삐져나온 섬이었다. 거대한 강 한가운데의 섬. 이름은 유원도였다. 유원지 안에 존재하는 섬이니 ...
* * * 중앙에서 보내는 세 번째 날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세레나의 목소리였다. 아침을 깨우는 소리, 대관람차를 떠나는 소리, 길에서 떠드는 소리. 그 뒤를 이어 잔뜩 격양되어 올라간 목소리. 어제 그 자리에 왔는데 보여야 할 게 보이질 않았다. 멍하게 선 클레어 대신 얼마간 주위를 살펴보던 세레나가 클레어에게 소리쳤다. "가만있지 말고 너도 좀 찾아봐,...
한숨 돌린 클레어는 3주짜리 선배에게 항의했다. "원래 저렇게 쫓아와?" "난들 알아? 나도 3주 살면서 처음이라고." "근데 왜 저래. 죽을 뻔했잖아." 세레나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했다. "네가 싫은가 봐." "정말이야?" "그걸 믿어? 그보다 다른 게 문제야. 왜 갑자기 어두워진 거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자신이 불러오지 않았는데도 혼자...
* * * 클레어는 자칭 선배 옆에서 죽으라고 놀이공원을 달렸다. 자칭 3주짜리 선배가 클레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음박질하며 쫓아왔다. 당장 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이 되니 생각이고 나발이고 다 날아갔다. 자신이 부른 게 아닌 바람이 슝슝 불었다. 천장이 쏜살같이 어두워졌다. 피 냄새 시체 냄새가 진동을 했다. 클레어는 이를 으득 갈고 소리쳤다. "어떻게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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