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뻘겠던 클레어의 얼굴이 조금 환해지자 심장이 조금 두근거렸다. 슬슬 여유를 되찾아가는 클레어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 "넌 안 아파?" "안타깝게도 아직 멀쩡합니다." 귓구멍이랑 머리가 쌍으로 아파죽겠는데 멀쩡한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거 말고는 다 멀쩡하니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클레어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왜 안타까워?" "알게 뭔가요. ...
힘들어. 소년 네크로스 마리 이아인, 통칭 아인 마이어가 직접 겪어본 세상은 그 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예쁜 백금발 누나랑 은회색 형이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하던 세계는 아는 사람, 아니 아는 어른이 없는 아이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는 사람을 찾아야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그 애를 찾아야지. 소년 아인 마이어는 혹여나 자신을 기억할...
지금도 이상한 이야기. 따지고 보면 웃겼다. 똑같은 거라고는 나이 하나뿐이다. 성별도 다르고 어디서 왔는지도 다르고 무슨 일을 했는지도 다르다. 같이 지낸 지 석 달째지만 성격도 다르다. 정반대까진 아니어도 확연히 달랐다. 그나마 말은 통하니 다행이었다. 똑같은 나이에 비슷한 일을 하다 같은 공간으로 쫓겨나 만난 지 겨우 석 달밖에 안 된 사이. 아예 다르...
* * * 클레어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휘어 불러낸 바람을 보트의 바람구멍에 집어넣었다. 조금 새면서 피리 소리를 내는가 싶던 바람이 그래도 용케 바람구멍에 들어갔다. 마음이 안정되어서 그런지 말을 잘 듣는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었다. 그동안의 삽질, 아니 허공에 대고 한 손질이 효과가 있는지 제법 바람이 들어간 보트가 쉬이익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올랐다. ...
활짝 웃은 세레나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가방을 멘 어깨에 손을 탁 얹었다. 순간 움찔 놀란 클레어는 눈만 껌벅이며 세레나를 쳐다보았다. 세레나가 어깨를 주무르는 시늉을 하면서 말했다. "그렇지? 이제 기운 좀 내라고. 자꾸 걱정되잖아. 어제 네가 나한테 그랬다고 이젠 내가 널 걱정하게 만드는 거야?"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 "그러니까 기운 내. 알았지? ...
네가 있으니 그릴만 해. 난 그러네. 내가 너한테 그 말은 했어? 세레나. 27kg짜리 가방을 짊어진 클레어는 오늘도 당연하게 욱신거리는 어깨를 억지로 무시해가며 강가로 걸어갔다. 먼 거리도 아니니 세레나는 알아서 잘 따라오겠지. 슬슬 노트 페이지를 다 써간다. 잉크도 얼마 안 남았으니 이대로 가다간 그림도 못 그리겠지. 그건 곤란해. 그러니 조금만 참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세레나는 누운 자리에서 고개를 돌려 클레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초록색 눈동자가 여태껏 보지 못한 형광을 내며 형형하게 빛났다. 그 황무지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던 벤치 아래 잡풀이 빛을 낸다면 이런 빛을 낼까. "내가?" "응. 네가 걱정돼, 세레나." 머리를 조여오던 붉은색 목소리가 확 달아났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
"만약 나가게 되면 같이 북부로 갈래? 적어도 내가 어느 정돈 아니까 나을 거야." "아깐 나가봤자 뭐할지 모르겠다며."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곤 해야 할 것 같아." 그건 그렇겠지.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해당 사항 없음이지만. 그런데 이거 다 내가 자초한 거잖아. 맞아, 네가 자초한 거야. 결국 아쉬울 거 하나도 없네. 그렇지, 역시 똑똑해....
"세레나!" 세레나는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기억이 안 나. 클레어가 날 불렀는데. 왜 부른 거지? "어디 있어, 세레나!" 클레어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클라렌스 트레버. 너는 그게 문제야. 아닌 척 하면서도 실제로는 다 보이잖아. 바보. 멍청이. 아니, 아니지. 나 자꾸 왜 이래? 세레나는 머리를 부르르 ...
이름이 민들레꽃이라던 풀꽃 하나로 나름대로 즐겁게 그림 그리기를 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날을 떠올린 세레나는 확 달아오른 얼굴을 느끼며 다시 울리는 귓가를 툭툭 쳤다. 그날만 생각하면 창피하다. 물론 세레나의 그림 솜씨는 너무 끔찍한데 클레어의 그림 솜씨는 너무 좋아서 확 대조되긴 했지만 클레어가 좋아하는 듯싶어서 다행이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들떠있던 클...
그래도 그린다고 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세레나는 마음을 다잡고 펜을 움직였다. 어디서 구했는지 꽤 품질이 좋아서 선이 쓱쓱 그려졌다. 세레나는 노트에 선 두어 개 긋고 민들레 쳐다보기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펜이 사각대는 소리가 한참을 울려 퍼졌다. 왜 이렇게 어려워! 이쯤 되자 슬슬 오기가 났다. 옆에서 펜을 빌려준 사람이 부스럭거렸다. "다 그렸어?" ...
입술을 짓씹은 클레어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흡사 의자 위에 가방을 탈탈 털어댔다. 의자 위가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바람에 세레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가방을 아예 밑바닥까지 탈탈 털자 마지막으로 노트 한 권이 툭 떨어졌다. 손바닥보다는 크고 한 귀퉁이에 펜을 껴놓은 노트였다. 클레어가 노트를 집더니 발걸음을 휙 돌려 조금 전 바라보던 반대편 의자로 성큼성큼 걸...
Our floating pale blue ark of endless forms most bea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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