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는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여전히 짜증나게 습한 강가였다. 상처가 잔뜩 난 굵은 나뭇가지가 험상궂게 생긴 바위에 끼어 비틀거렸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어쩐지 습하다 했더니 안개가 잔뜩 끼었다. 강가에 밀려온 비닐봉지가 약한 물살에 쓸려 허우적거렸다. 그 꼴을 보고 있으니 언젠가 강물에 밀려오던 썩은 나비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런 거 차라리 안 ...
가끔 난데없는 꿈을 꿀 때가 있다. 머릿속을 흐르는 혈관이 터져 피가 흐른다고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꿈을 꾼다. 뜨거운 증기가 불러온 매운 바람에 실려다니던 쇳가루를 매일같이 먹다보면 꿈도 시뻘겋게 변한다. 먹은 것을 다 울궈내고도 울궈낼 것이 없이 시뻘건 피를 토하다보면 언제쯤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짐작도 안 간다. 아니면 얼마 안 가 빠져나갈 수 ...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를 모르겠다. 클레어는 손목에 찬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앉은 자세로 계속 있자니 벌써 오후 3시가 넘어간다. 물론 이렇게 좋은 시계를 사지는 않았다. 주웠다. 소식이 끊긴 마을을 탐사하러 갔다가 발견한 시계였는데 얼어죽은 마을에서도 멀쩡하게 돌아가서 신기했다. 마을의 시장이 손목에 차고 있었는데 시체가 꽝꽝 얼어서 장...
팔을 움직일 수 없으니 저항도 소용이 없다. 몸을 들썩거려보아도 그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엄지와 검지를 벌려 목에 얹는다. 하다못해 입만이라도 움직이려고 해도 그녀의 왼손이 숨을 못 쉬게 하려는듯 입을 틀어막았다. 인중이 세게 눌려 아예 이빨을 내려부술 기세로 짓누르는 힘에 토할 것만 같았다. 핏줄이 가득한 세레나의 흰자위가 선연한 빛을 내며 번...
분명 보트 위에서 그녀의 다홍색 눈동자가 찬란한 열기를 뿜어내며 그를 끌어안는 꿈을 꾸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다. 클레어는 다시 꿈을 꾼다. 그녀가 말한다. 너 이런 거 좋아하는지는 몰랐어. 진짜 학자 같다. 그 이후로 얼마나 꿈 속에서 그 날의 그 장면을 다시 틀어보았는지 그조차도 모른다. 때로는 눈을 떠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비참해질 만큼 그는 그 꿈...
클레어에게 다가간 세레나는 아직 접은 상태인 클레어의 다른 다리를 툭 쳤다. 이젠 뱃전에 등을 기대고 드러누운 클레어가 다리를 슬금슬금 폈다. 세레나는 클레어의 다리 사이로 한쪽 무릎을 짚고 다른 쪽 무릎은 밖으로 뺀 채 허리를 숙여 클레어의 어깨 옆으로 팔을 짚었다. 딱 학자 같은 애인데 그래도 스무 살 남자애라고 어깨는 쩍 벌어진 게 웃겼다. 그러자 당...
아무리 맘에 안드니 뭐니 해도 볼에 뽀뽀까지 해 준 남자애 손이 어깨를 주무르고 있자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마 물에 비춰본다면 얼굴이 뻘개져 있을게 틀림없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럴 땐 계속 입을 놀리는게 그나마 덜 민망하다. 뭔 말할지 생각이 안 난다는게 더 큰 문제였지만 아무튼 그랬다. 세레나는 마구 머리를 굴리다가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을 툭 내뱉었...
불어오는 강바람은 뜨거운 곳에서 일하다가 쐰 바닷바람만큼 시원하고, 천장에서 한번 걸러진 햇살은 딱 기분 나쁘지 않게 따뜻하고,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는 상처 많고 흉터 많고 잡티 많이 묻은 남자애는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얘가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싶다. 모든 게 다 잘될 거라는 기분은 이런 걸까. 따지고보면 그동안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단 말이지....
* * * 소년 아인 마이어는 네크로스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적어도 소년이 기사님과 소녀와 함께 머무르던 시절에는 몰랐다. 적어도 그 시절에는. 그 예쁜 백금발 누나와 회색머리 형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바깥 세상에 소년이 발을 디딛었을 때, 그토록 찬란하던 세상은 색을 잃었다. 네크로스가 죽음을 뜻하는 단어임을 알게 된 것은 소년 네크로스 마리 ...
* * * "누나. 오랜만이야. 왜 날 버리고 떠났어? 내 이름은 기억나?" 시커먼 물길 위에서 그 애가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뒤로 시커먼 어둠이 내려앉았다. 마치 흑백으로 초상화를 그려놓은 것만 같다. 세레나는 저절로 떨리는 손을 가누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너무 좁다. 그 물길이 좁고 컴컴하다. 머리가 자꾸만 울린다. 이젠 얼굴...
* * * 예전에는 번성한 도시가 있을 자리에 새롭게 들어선 황무지는 볼 때마다 기분 나빠지는 장소였다. 손톱으로 휴지를 덕덕 긁으면 나오는 하얀 먼지가 가득한 거리를 걷다보면 절로 목에서 기침이 나왔다. 조금 어두워지는 기척만 느껴지면 여기저기 들어선 비쩍 마른 건물에 번쩍거리는 글자가 잔뜩 생겨났다. 그 글자들이 좀비를 부르는 소환주문이라도 되는지 얼마...
그래도 이건 기회다. 이 재미없고 말주변 없는 애한테서 뭐라도 좀 끌어내 볼만한 기회. 그럼 뭘 해야 할까. 세레나는 가장 그럴듯한 뭔가를 끌어내기 위해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아, 생각났다. 그거다. 세레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 칭찬해봐." "널 칭찬해보라고?" "어! 나 칭찬해봐. 그 정도는 할 줄 알지?" 클레어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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